'주식불패 신화'에 국민 절반이 빚내 투자…짧고, 굵었던 '3低 호황 파티'

입력 2018-11-09 18:26   수정 2019-05-10 18:12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9) 1989년 코스피지수 1000 돌파

美 '플라자합의'로 원화 약세…가격경쟁력 앞세운 기업들
해외서 맹활약, 수출 급증…韓 경제, 유례없는 호황 누려

정부는 포철 등 국민주 보급
주부·학생·직장인 투자 광풍…객장엔 미아 찾는 방송까지

노사 분규·원화절상 압박…대내외 악재 한꺼번에 몰려
코스피 1년 반 만에 반토막…16년 뒤에야 1000선 안착



[ 이태호 기자 ]
‘(속보)G5, 달러 가치 하향 조정 합의.’

분단 이후 첫 이산가족 상봉이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적셨던 1985년 9월22일 밤. 외신들은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한 회담 소식을 급박하게 타전했다. 주요 선진국들이 미국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재정수지와 경상수지 ‘쌍둥이’ 적자로 궁지에 내몰린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요구를 일본 서독(독일) 영국 프랑스 등이 전격 수용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의 핵 군비 경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미 의회에서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면 자칫 무역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글로벌 금융 역사상 최초의 ‘조직적’ 환율 조정인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는 이후 한국과 일본 경제의 운명을 크게 뒤바꿔 놓는다. 수출 주도로 성장한 일본 경기는 엔화 가치가 급등(2년여간 달러당 240엔→120엔대)하면서 곧바로 침체에 빠져들었다.

반대로 한국은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에 진입한다. 수출 부진과 고물가로 고전하던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1986년부터 3년간 연평균 12%로 치솟았다. 일본을 맹렬히 추격해온 중화학·전자 대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유럽공동체(EC) 시장을 잠식한 결과였다.

전후 폐허에서 신흥공업국(NIC)으로 성장해 ‘한강의 기적’을 일군 한국 경제는 이때부터 대만·홍콩·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3저’로 한국 경제 초호황

“올 들어 국내 경기가 크게 좋아지고 있습니다.”(1986년 4월 대한뉴스)

한국의 수출 실적은 엔화 가치 상승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1986년 1분기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27% 늘어났다. 현대자동차의 ‘포니엑셀’ ‘프레스토’ 등 자동차 수출 대수는 1분기 6만3000여 대로 207% 급증했다. 합성수지 수출은 36%, 석유화학은 40% 각각 늘어났다. 성장 한계에 부딪혔던 신발과 완구 수출도 활기를 되찾았다. 엔화 대비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수출 가격이 크게 낮아지자 주문이 몰려들었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침체에 빠진 경기의 대반전에 경제단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은 △낮은 글로벌 금리 △낮은 국제 유가 △(엔화 대비) 낮은 원화 가치 등 이른바 ‘3저(低)’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선진국들이 경기 부양을 위해 낮은 금리를 유지하던 상황에서 나타난 유가 급락은 글로벌 수요 회복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국제 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와해가 가져온 증산 경쟁 덕분에 배럴당 가격이 1985년 30달러에서 이듬해 12달러까지 떨어졌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한국 경상수지는 1986년 28억달러 흑자로 돌아섰고 이듬해 세 배인 88억달러,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엔 131억달러를 기록했다. 저축과 기업 이익의 동반 증가는 외채에 대한 의존도를 떨어뜨렸다.

미국과 일본이 90%를 장악한 시장에서 분투를 거듭하던 반도체 수출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의 덤핑 공세로 1985년 ‘사업 철수’ 위기론까지 불거졌던 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은 이듬해부터 ‘256KD램’ 양산에 박차를 가했고 1993년 메모리 분야 세계 1위 왕좌에 오른다.

코스피 1000 ‘역사적 돌파’

“네 살 남자 아이의 부모님을 찾습니다.”

주가는 3저 현상을 타고 자고 일어나면 올랐다. 아이 손을 잡고 온 주부들이 급증하면서 증권사 객장에서는 놀이공원에서나 들을 법한 ‘미아 찾기’ 방송이 흘러나왔다. 점심시간엔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주식 거래대금은 1985년 7조원에서 1989년 86조원으로 4년 동안 열두 배 불어났다.

기업들은 앞다퉈 주식을 공모하면서 자본시장에 몰려드는 자금을 흡수했다. 1985년 342개였던 상장회사 수는 1988년 500개를 돌파했고, 유상증자 금액은 같은 기간 2590억원에서 6조7210억원으로 26배 증가했다. 1989년 유상증자 대금은 11조1245억원으로, 사상 처음 10조원을 넘어섰다.

정부도 증시 활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12월 당선 직후 소득 중위계층 이하 국민 대상 ‘국민주 개발·보급 계획’을 발표했다. 민정당 총재 시절 대선 공약이었던 국민주 보급은 1988년 4월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을 시작으로 이듬해 한국전력 기업공개(IPO)로 이어졌다. 국민주 보급에 힘입어 주식 거래 인구는 1985년 77만 명에서 1989년 전체 인구의 절반(45%)에 가까운 1901만 명으로 급증했다.

‘주식은 사두면 오른다’는 신화는 갈수록 더 많은 투자자를 시장으로 끌어들였고 시장은 대량으로 쏟아지는 신주(新株) 물량까지 모두 소화해냈다. 신바람 난 증권사들은 경쟁적으로 융자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현금의 두세 배까지 주식을 사도록 부추겼다.

코스피지수는 1989년 3월31일 마침내 1004를 기록해 대망의 1000선을 돌파했다. 1985년 초 139포인트에서 불과 4년 만에 달성한 기록이었다.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주가수익비율(PER·시가총액/순이익)은 6배에서 14배로 올라 있었다. 문제는 국민의 절반이 빚을 내 고가에 매입한 주식을 누가 떠받쳐줄 수 있느냐였다.

붕괴된 주식불패 신화

주식시장은 예상보다 빠르고 더 잔인하게 무너졌다. 코스피지수 1000 돌파 전부터 증시 주변에는 많은 불안 요인이 잠복해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은 사상 최대 노사분규를 촉발시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임금과 물가 상승은 기업 실적을 짓눌렀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1987년 10월 ‘검은 월요일’ 이후 원화 평가절상 압박 수위를 높여 갔다. 1988년엔 한국과 대만을 첫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고, 절상 압력은 1989년 조지 H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됐다.

과도한 증자와 국민주 공모도 공급 과잉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코스피지수는 4월1일 1007을 고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1년 반 만인 1990년 9월17일 566포인트(-43%)까지 하락했다. 빚을 내 주식을 사들인 투자자들의 악성 매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신용거래 담보 가치를 유지하지 못한 주식의 시가 반대매도는 다시 수많은 ‘깡통계좌’를 만들어 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국민주를 산 개인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재무부는 1989년 말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증시를 안정시키겠다”(12·12 조치)고 호언했지만 한은과의 마찰로 허언에 그쳤다.

재무부는 고민 끝에 1990년 5월 4조원의 ‘증시안정기금’ 조성을 골자로 하는 특단의 증시 안정 대책을 발표한다. 일본의 사례를 본떠 만든 증안기금 출자에는 증권사, 은행, 보험, 상장회사들이 참여했다. 이 기금은 그해 10월10일 980억원 규모의 깡통계좌 매물을 동시호가로 일괄 매입했다. 곳곳에서 강제 매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결국 개인투자자들은 넋을 잃은 채 텅 빈 잔고를 확인해야 했다. 신문과 방송에선 연일 ‘주재민(株災民)’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전해졌다.

추억으로 남은 고성장 시대

코스피지수는 1994년 금리 하락과 무역수지 개선에 힘입어 다시 1000을 돌파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200대까지 고꾸라졌다. 1999년에도 정보기술(IT)주 급등으로 1000 고지에 도달했으나 거품 붕괴로 2001년엔 반 토막 났다. 1000선 위에 안착한 것은 첫 돌파 후 16년이 지난 2005년부터였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3저 호황’ 전성기를 끝으로 30년 동안 꾸준히 낮아졌다. 2016년 초 28년 만에 기준금리 연 1.5%, 국제 유가 배럴당 20달러대, 원·달러 환율 1200원대라는 3저 기회를 다시 맞았지만 성장률은 2.9%에 그쳤다. 저출산과 고령화, 자본의 한계생산성 하락으로 1980년대 고성장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

일본 경제는 엔고(円高) 불황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1992년 거품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 침체에 접어들었다. 과도한 통화완화 정책으로 부풀린 자산 가격 거품이 한꺼번에 터진 결과였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87년 일본의 17%(약 3500달러)에서 2017년 78% 수준으로 격차를 줄였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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